노루의 흔적을 찾아 뒷산을 오르다
담비가 노루를 추적하는 현장을 목도한 이후 며칠이 지난다. 조심성 많은 노루가 인기척이 있는 두메산방 앞을 천천히 걸어가야 할 정도로 아주 지쳤던 상황에서 바로 그 뒤를 맹렬히 추적하는 담비들을 무사히 따돌릴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뒷산을 올라 결과를 바로 확인하기에는 저번 고라니의 죽음으로 왠지 마음에서 싫었다. 그래서 올라가지 않았다.
지난가을 이후 바로 했어야 할 작업, 고추밭 정리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밭으로 올라가는 길을 뒷산을 통해 가보기로 한다. 생명을 담보로 쫓고 쫓기는 치열함이 있던 장소로는 너무나 평온한 풍경... 과연 노루 사체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배설물만 보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담비는 아마도 산방에서 지체한 시간 때문에 추적에 실패하고 그 시간만큼 노루는 탈출할 여유를 번 것 같았다. 사람 세상에도 생존경쟁은 있지만 자연의 경쟁은 정말 냉혹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노루와 고라니가 많은 이유 - 호밀
이 깊은 산골짜기에 이른 봄 이즈음엔 산에 먹을게 많지 않다. 특히 초식동물에게는 더욱이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고라니와 노루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 푸른 싹을 내고 커가는 싱싱한 호밀을 이들이 본다면 그 유혹을 이기기 힘들 거 같다. 내가 그들이라도... 사정이 이러하니 포식자인 담비가 따라올 수밖에...
호밀은 내한성이 엄청나게 강해 겨울에 파종해서 눈이 내려도 새싹이 눈 밑에서 자라고, 반대로 여름에는 엄청난 고온과 건조한 기후에도 끄덕 없이 견디는 말도 안 되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계속된 경작으로 염류가 축적된 토양에서도 잘 자라며, 그러한 염류 제거에도 탁월한 작물이다. 그러나 호밀을 심는 주된 이유는 수확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작물 재배 전에 갈아엎어 살아있는 퇴비로 쓰기 위함이다. 어차피 갈아엎어질 운명이니 동물들이 먹어치워 배설물로 남겨지는 게 오히려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탁 트인 개활지에서 먹고 쉬는 걸 좋아하는 고라니 노루에게는 인적 없는 두메산방 골짜기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셈이다. 포식자만 없다면...
봄, 산마늘과 냉이
간만에 밭에 올라선다. 2년 전에 심었던 사과나무와 매실나무는 아직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비실거린다. 춥기 때문이다. 말라 비틀어진 잡풀더미 속에서 그나마 생명의 모습, 산마늘의 새파란 잎이 돋아나고 있다. 작년에 이식한 것인데 너무나 양지바른 곳이어서인지 작년에는 엄청 힘들어하더니... 힘이 잔뜩 들어간 파란 새싹에서 생명의 역동이 전해진다. 감사한 일... 가만히만 두어도 이래 싹을 튀어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어서 빨리 자리를 잡아라...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니 무심했던 또 하나. 냉이. 밭에 냉이가 이렇게도 많았나 싶다. 허참.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보다 여기며 고추밭 정리 작업에 들어간다. 지지대를 뽑고 수명을 다한 고추를 뽑고... 그리고 멀칭비닐까지 걷어내야 오늘 작업이 끝나는 것인데 절반쯤 하다 보니 꽤가 난다. 하기 싫은 걸 어쩌냐... 산중에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오늘 할 일 내일로 미룬다고 큰 일이 일어날 것도 아닌데... 애라... 약초곡괭이로 냉이를 캐기 시작한다. 간혹 꽃망울을 갖고 있는 냉이도 있는 걸 보면 또 며칠 지나면 냉이도 손댈 수 없어 보인다. 냉이를 본 김에 한 바구니 저녁 한 끼 차릴 정도를 캔다. 오늘 밭일 끝.
호밀밭의 노루들
늦은 오후 시간. 골짜기 호밀밭에 노루 형제들이 다시 나타났다. 머리에 뿔이 없는 걸 보면 암노루다. 어린 노루일 수도 있는데 체격을 봐서는 다들 성장한 노루들. 엉덩이가 전부 뭉실뭉실 하얀 털로 덮이걸 보면 고라니가 아니라 노루라는 증표다. 보통 노루와 고라니의 차이점은 엉덩이 색깔, 수컷의 구별은 노루는 머리에 뿔이 있느냐고 고라니는 입에 송곳니가 있느냐로 알 수 있다. 호밀 밭에 모여 풀을 뜯고 있는 노루들... 다시금 골짜기의 평화를 느끼게 한다.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아 이게 자연의 조화인가 마음속으로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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